바로코만의 세계 RSS 태그 관리 글쓰기 방명록
2022-07-07 00:31:04

어제 받은 댓글 중에 '멋진 전공을 하셨네요'가 있어서 여기에 대한 해명 및 사연을 풀어보고자 한다.

 

나의 전공은 작곡. 하지만 결코 이걸 자랑스럽거나 멋지다고 생각한 적은 사실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하고 싶었지만 막상 할 게 없어서 어중이떠중이로 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으나 워낙에 날고 기는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던지라 그중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었기에 차선으로 고 1 때 작곡 및 피아노 레슨을 시작하였다.

 

(작곡 전공의 실기 시험 중에는 피아노도 포함되어 있기 떄문에)

 

바로코의 자필악보

 

그렇게 해서 지방에서 top으로 손꼽히는 K국립대에 합격하고도 미국 이민이라는 남들에게는 비밀로 한 계획이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창원에서 통학하며 대학을 다녔다. 1, 2학년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버티었다. 하지만 3학년부터가 문제였다. 현대 음악을 혐오하기 때문에 무조로 곡을 도무지 어떻게 쓰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공 특성상 현대음악 관련 음악회 및 세미나도 참석해야 하는데 워낙에 싫어했던지라 선배들로부터 찍히면서까지 불참하곤 하였었다. 대신 (역시 남들에게는 비밀로 한) 미국 이민 계획 때문에 영어 관련 교양 수업들도 듣고 학교 내 어학교육원까지 등록하여 나름 영어 공부에 더 기를 썼다. 이런 나를 그 당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지금 생각해보니 차라리 언어 계통의 분야를 전공했었더라면 나의 인생은 지금과는 180도 달라졌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일반 4년제 대학에서의 작곡 전공이 현대음악을 깊이 파고드는 학문인 줄은 몰랐었다. 그걸 알았으면 애초부터 차라리 실용음악과를 갔을 텐데 그 당시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0.01도 없었던지라... 

 

무사히 마친 졸업 이후부터 나에게는 작곡 전공이라는 꼬리표 혹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노래 좀 만들어달라인데 이건 사실 나로서는 여간 불쾌한 부탁이 아닐 수가 없다. 일단 그런 노래는 클래식 계통보다는 실용음악 쪽이며, 어렵사리 만들어도 바로 표절 시비가 붙을 만큼 어디서 많이 들은 선율이나 패턴 등이 나와버린다. 

 

그럼 피아노나 기악 작품 곡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클래식 시장 자체가 워낙에 폐쇄적인 분야이고, 또 현대음악이 만연한 시대에 고전풍의 곡을 만들어 발표하면 오히려 전문가들, 아니 심지어 클래식 애호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 쇤베르크니 메시앙이니 이런 느낌을 써야 하는데 내 머리로는 도무지 그런 음악은 나올 수 없다. 

 

대신 내가 눈을 돌린 것은 편곡. 일단 유튜브에 비발디 기악 작품 전곡을 업로드한다고 소개한 바 있는데, 오늘 사실 여름 3악장을 완성시켰다. 일단 클래식 자체가 작곡가가 죽은 지 몇 세기나 흘렀기 때문에 저작권은 말소되었고, 남들이 연주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작업해서 올리는 거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바로코의 유튜브 채널

 

그리고 바로크 음악 특성상 통주저음을 담당하는 하프시코드(쳄발로)가 악보에는 없는 오른손 파트를 화음을 넣어가며 연주하는데 내가 하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화성학 이론을 기반으로 한 나만의 철칙을 세워 매일 이 작업을 작품 번호 순서대로 하고 있고, 다른 여러 가지 바로크 작품들이나 나만의 트랜스크립션도 올리고 있지만 비발디 음악이 가장 반응이나 호응도가 좋은 편이다. 

 

그래서 결론은 비록 나의 백 퍼센트 의지와 뜻으로 시작한 분야는 아니지만, 나름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방도를 찾아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하나씩 조금씩 실천해나가는 중이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성가곡이나 실내악 같은 장르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아무튼 혹여나 이 글을 보고 계신 다른 작곡 전공 분들 계시다면 많은 댓글과 공감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