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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7 03:47:49

포토퍼니아에서 합성 및 편집

 

1. 1678년 3월 4일에 미숙아로 출생

그의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에 베네치아에 지진이 일어나 임신한 배를 벽에 세게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7달 만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안토니오 비발디였고, 혹시나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노파심과 두려움에 몇 달이 지나고 안심할 때가 이르러서야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2. 붉은 머리의 사제 (The Red Priest)

사실 비발디 이외에도 사제와 음악가를 병행한 사람들이 더 있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비발디만이 기억될 뿐이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사제가 된다는 건 곧 직업에 대한 안정성과 더불어 사회로부터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아버지의 권유로 어린 안토니오 비발디는 사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수도원에 머물지 않고 학교 다니는 식으로 집에서 통학을 하였는데 덕분에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은 곧 비발디가 프로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3. 피에타 양육원 (Ospedale della Pietà)

베네치아에는 고아들을 수용하여 교육하는 병원 겸 양육원이 총 네 곳이 있었는데 피에타는 그중 하나였다. 원생들 중 양가 부모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수준 높은 교육을 위하여 일부러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맡겨 기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는 자제 높은 귀족들로부터 제정 지원까지 받을 정도로 이곳의 교육 열기는 뜨거웠다. 

 

비발디는 이곳에서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하여 악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생들을 위하여 쓰여서 빈약하다는 비평까지 받는데 사실 이건 타깃이 여자아이들이어서가 아니라 비발디 성격이나 취향 자체가 다른 작곡가들과는 조금 달랐을 거라고 작곡 전공인 나 자신이 조심 스래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음악은 작곡가의 영혼의 상태와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4.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 이전에 비발디가 어쩌면 바이올린에 있어서 비루투오소가 아니었나 싶다. 빈약한 증거이긴 하지만 비발디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고, 극작가 골도니 등의 증언 등을 통하여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비발디에 대하여 짐작만 할 뿐이다. 

 

 

5. 피젠델과의 인연

비발디의 몇몇 바이올린 협주곡에는 '피젠델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 피젠델이라는 사람은 비발디의 가르침을 받고자 유학한 독일 드레스덴 궁정 출신의 음악가이다. 앞서 소개한 양육원 이야기를 근거로 볼 때 어쩌면 비발디의 유일한 남자 제자였지 않았을까라는 재미있는 추측도 해 본다.

 

몇 년 동안 열심히 교육받은 피젠델은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콘서트마스터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 이전까지는 평범한 연주자일 뿐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비발디와 드레스덴 공정과의 교류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고, 피젠델 또한 스승을 위한 작품을 남긴 걸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피젠델의 음악은 여느 독일 작곡가들보다 더 밝은 느낌의, 그야말로 Vivaldish라고 할 수 있겠다. 

 

 

6. 국제적인 유명인사

드레스덴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도 그렇고 출판에 관하여서도 비발디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진출하였다. 여기에는 더 나은 인쇄 기술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덕분에 독일 내에서만 활동하였던 바흐도 비발디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다 알다시피 하프시코드나 오르간을 위한 트랜스크립션들을 몇 곡 만들었다.

 

그리고 짐작컨대 사계의 인기는 지금이나 그 당시나 굉장했을 거 같다. 오늘날로 치면 음원차트에서 탑 쓰리에 손꼽히지 않았을까, 모든 유럽 사람들이 흥얼거리며 대화의 주제에 꼭 언급하지 않았을까 이런 기발한 상상을 해본다.

 

 

7. 특유의 낙천적 성격

비발디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몇 개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것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덕분에 한평생 병을 내내 달고 살다시피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장수라고 할 수 있는 60세를 넘겨서까지 살았었다. (정확히는 63세까지) 

 

 

8. 루머

비발디와 안나 지로와의 관계는 연일 화제였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아마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비발디 입장에서는 안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건강을 돌봐줄 사람(안나의 언니 파올리나)이 필요했었고, 안나 지로 역시도 오페라 가수로서의 명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발디는 엄연한 가톨릭 사제였다는 사실.

 

건강 문제였는지 음악적 영감 문제였는지는 서로 말이 달라서 알 수 없지만 비발디는 평생에 미사 집전을 한 두 번 하고 나머지 일생은 후학 양성에만 힘썼었다. 오페라 작곡에 대한 바티칸과의 갈등에도 그가 파문당하지 않은 이유는 뒤에서 그를 든든히 지원해 준 귀족들의 입김과 영향력이 워낙에 강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로와 관련된 루머는 오늘날까지도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다. 몇 달 전 어느 신문기사에서 바티칸에서 이에 대해 입장 표명(?)을 했다고 했다고 했는데, 제목에 낚인 건지 정작 본문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이 없어서 여전히 이 루머는 그야말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는 거 같다.

 

아무튼 비발디가 공인인 만큼 그리고 그의 말년이 보여주듯 이 루머 하나 때문이라도 그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9. 그의 사후_1

살아생전 전 유럽에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 있었지만 말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극빈자로 생을 마감한 비발디. 그에 대한 일종의 원한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째서인지 서거일 며칠 후에 그의 무덤은 헐려버리고, 그의 유골은 다른 것들과 뒤섞여버려 결국 그의 무덤은 그 뒤로부터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비발디의 장례식에서 오늘날의 빈 소년합창단의 전신인 소년합창단이 참석하여 조가 등을 불렀는데 그중에는 어린 요제프 하이든도 있었다고 한다.

 

 

10. 그의 사후_2

앞서 잠깐 언급한 바흐 덕분에 비발디의 음악이 발굴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무지치를 필두로 에우로파 갈란테 같은 많은 시대악기 연주단체들 덕분에 비발디의 숨어 있는 명곡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이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성악 부문에서도 체칠리아 바르톨리를 비롯한 유명 성악가들이 그 어렵기로 악명 높은 비발디의 아리아들을 잘 소화해 주고들 계신다. 흔히들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 아리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르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이 영상을 보면 이야기가 확연히 달라지리라 확신한다. 

 

출처: https://youtu.be/AxwyQZhBlZw

 

참조한 곳: https://medium.com/@barroco05/ten-facts-about-antonio-lucio-vivaldi-f11106c3eda1

 

Ten Facts about Antonio Lucio Vivaldi

He was born on March 4, 1678 as a prem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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